돈을 빌리려면 성적표를 가져와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은행 대출이 필요한 순간, 가장 두려운 존재는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의 '신용 점수'를 평가하는 시스템입니다. 점수가 몇 점이냐에 따라 누군가는 집을 살 기회를 얻고, 누군가는 거절당합니다. 개인에게 신용이 '생존'의 문제라면, 국가나 거대 기업에게 신용은 '존망'의 문제입니다. 삼성전자나 애플 같은 초일류 기업, 심지어 미국이나 대한민국 같은 국가조차도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려면 누군가에게 성적표를 검사받아야 합니다. "이들이 돈을 갚을 능력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공신력 있는 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전 세계에 단 세 곳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S&P 글로벌이 있습니다. 무디스(Moody's), 피치(Fitch)와 함께 전 세계 신용 평가 시장을 3분할하고 있지만, S&P 글로벌이 가진 위상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입니다. 이들이 부여하는 'AAA' 등급은 곧 '돈을 떼일 염려가 없다'는 보증수표이며, 이 등급이 하나라도 떨어지는 순간 해당 국가의 환율은 요동치고 기업의 이자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납니다. 투자자들이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는 이 거대한 자본 시장에서, S&P 글로벌은 등급이라는 펜대 하나로 자금의 물꼬를 트기도 하고, 틀어막기도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평가받는 사람이 돈을 낸다 (Issuer-pays)
S&P 글로벌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모순적이면서도 강력한 비즈니스 모델인 '발행자 지급(Issuer-pays)' 모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구조는 매우 기이합니다. 시험을 보는 학생(채권을 발행하려는 기업/국가)이, 자신의 성적을 매겨줄 선생님(S&P)에게 거액의 시험료(수수료)를 지불합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돈을 낸 사람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겠느냐"는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 시장은 이들의 평가 없이는 단 1달러도 움직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기관 투자자나 연기금은 내부 규정에 따라 S&P와 같은 메이저 신용평가사의 등급이 없는 채권은 매수할 수 없습니다. 즉, 기업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리려면, 싫든 좋든 S&P 글로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며 통행세를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쟁이 불가능한 구조적 독점입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이들의 수익이 경기의 호황과 불황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기업들은 공격적인 투자를 위해 채권을 발행합니다. S&P의 일감이 늘어납니다. 경기가 나쁠 때는 기업들은 운영 자금을 확보하고 빚을 돌려막기 위해 채권을 발행합니다. 오히려 등급 평가 수요가 더 늘어납니다. 금리가 변동할 때는 금리가 바뀌면 채권 시장의 거래가 활발해지고, 새로운 파생 상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S&P는 여기서도 수수료를 챙깁니다. 결국 시장이 상승하든 폭락하든, 기업들이 자본을 필요로 하는 한 S&P 글로벌의 현금 창출 능력은 결코 훼손되지 않습니다.

S&P 500 지수의 저작권자
많은 서학개미들이 미국 주식에 투자할 때 가장 먼저 듣는 조언은 "시장을 이기려 하지 말고 시장을 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장'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S&P 500 지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S&P 500이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S&P 글로벌의 지적 재산이라는 점입니다. 전 세계 자산 운용의 트렌드는 펀드매니저의 감에 의존하는 '액티브'에서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로 완전히 넘어왔습니다. 블랙록(BlackRock)이나 뱅가드(Vanguard) 같은 거대 자산운용사들이 SPY, IVV, VOO 같은 ETF를 운용하려면, 반드시 지수의 주인인 S&P 글로벌에 라이선스 사용료를 내야 합니다. 이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더 쉬운 장사입니다. 지수는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추가적인 생산 비용이 들지 않는 무형의 자산입니다. 또한, 전 세계의 연금과 투자 자금이 미국으로 몰릴수록, S&P 500 추종 자금(AUM)은 커집니다. 자산 규모가 커지면 S&P 글로벌이 가져가는 수수료도 자동으로 불어납니다. 우리가 ETF를 한 주 매수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S&P 글로벌의 금고에는 꼬박꼬박 돈이 쌓이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자산 가격이 오르면, 그 수혜를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아무런 노력 없이 누리는 곳이 바로 이 회사입니다.
대체 불가능한 권위와 데이터 권력
그렇다면 왜 다른 회사들은 S&P 글로벌을 따라잡지 못할까요? 이 회사가 가진 진정한 해자(Moat)는 기술력이 아닌 '시간'과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1860년부터 160년 넘게 금융 데이터를 축적해 온 역사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금융 위기가 닥칠 때마다, 혹은 새로운 금융 상품이 나올 때마다 전 세계 투자자들과 규제 당국은 S&P의 기준을 '표준'으로 삼아왔습니다. 이는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를 만듭니다. 모두가 S&P의 등급과 데이터를 쓰기 때문에,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와도 아무도 그들의 데이터를 쓰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S&P 글로벌은 IHS 마킷(IHS Markit)과의 합병을 통해 또 한 번의 진화를 마쳤습니다. 단순히 기업의 신용만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원자재, 자동차, 해운, 공급망,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산업 전반의 방대한 데이터를 독점적으로 공급합니다. 현재의 금융 시장은 AI와 알고리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AI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연료는 무엇일까요? 바로 '신뢰할 수 있는 정제된 데이터'입니다. S&P 글로벌은 이 데이터 시장의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사들은 수만 달러에 달하는 이들의 데이터 터미널과 구독 서비스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것 없이는 눈을 감고 투자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이 "가장 이상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통행료를 받는 다리와 같다"고 말했듯, S&P 글로벌은 자본 시장이라는 거대한 대륙으로 들어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튼튼한 다리를 소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금융 시장의 규칙을 파는 절대자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심판관, S&P 글로벌의 본질을 파헤쳐 보았습니다. 많은 투자자가 "다음 테슬라는 어디인가?", "제2의 엔비디아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의 승패를 예측하는 것은 짜릿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면, 승패와 상관없이 돈을 버는 존재가 보입니다. S&P 글로벌은 선수가 아닙니다. 그들은 경기장을 소유하고, 경기 규칙을 만들고, 심판을 보며 입장료를 챙기는 '주최 측'입니다. 기업이 빚을 내면 수수료를 받고, 투자자가 주식을 사면 라이선스 비용을 받고, 기관이 분석을 하려면 데이터 구독료를 받습니다. 금융 시장의 복잡성이 커질수록, 투자의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기준'을 제시하는 S&P 글로벌의 권력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결국 S&P 글로벌은 단순한 금융 서비스 기업이 아니라, 금융 시장의 '질서' 그 자체를 파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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